일전에 크툴루 신화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 이유는 이 소재가 다루는 근원적 공포라는 것이 러브크래프트의 제노포비아 성향과 닿아있다는 설에서 있기도 합니다.
이해를 넘어서는 범주에 있는 공포의 본질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인간이 신화를 넘어 자연을 지배했다고 한다면, 코즈믹 호러 계통의 문학은 방식이 아닌 공포의 감정 그 자체에 집중하면서 이런 혼란을 경험했던 계층의 공감대를 매우 크게 자극하죠.
다만 이건 모든 종류의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초반에 가지는 공통된 종류의 감정입니다. 미지에 대한 공포는 나에게 실제로 해를 입힐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얼마나 빠르게 대처하느냐, 그리고 그것을 내가 컨트롤 할 수 있는 범주에 속해있느냐에 따라서 극복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정해집니다.
어떻게 몸부림 쳐도 극복할 수 없는 대상이고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에 있다는 전제가 기본적으로 깔려있는 형태가 소위 말하는 코즈믹 호러 인데, 바로 그 점에서 저와는 상성이 맞지 않습니다.
내가 모르는 것에 대한 또다른 방식의 통제는 배제시키는 것이고, 그렇기에 '공포'와 '혐오'는 언제나 동일한 궤도상에 있다고 저는 여깁니다. 혐오는 자신이 지배당할 수 있다는 공포가 전제되어 있는 상태에서 힘의 방식으로 지배해서 극복하려는 행동이죠.
미지에 대한 끝이 없는 공포, 극복할 가능성도 전제되어 있지 않은 환경에서 그걸 창작의 환경에서 소비하여 해소하려는 사람들은 괜찮다고 보자구요. 거기 있는 캐릭터가 미치거나 죽어나가는 잔인성을 꼭 현실과 대비시키려는 생각은 아니지만.
근데 동일한 감정을 해소하기 위한 몸짓이 나타나는 현실에서의 현장은 그와 반대로 대단히 폭력적입니다.
사회구조 속에서 개인의 불안을 만들어내는 구조적인 결함은 언제나 미시적이며, 불안의 연쇄가 끝이 보이지 않는 상태로 간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뭔가 다른 방식의 탈출구를 찾습니다.
눈에 보이는, 특정이 가능한 배제 대상을 찾는거죠.
지금까지 익숙한 환경에 어떤 변화나 영향을 가져온 대상을 보며 내가 그동안 느껴왔던 불안들을 전가시킵니다. '이것을 없애버리면 내가 가진 고통이 사라지겠지.' 하는 불안을 덜어내려 하는 행동이지만 전혀 논리적이지 못한 미신이고, 이런 방식으로 또 다른 대상, 그리고 다른 대상을 끊임없이 공격하는 거죠.
문을 닫는 방식으로 단절하고 접근을 꺼리고 혐오의 단어로 밀어내고,
이 범주가 인종에 가깝게 포괄적으로 커지면 그게 바로 제노포비아가 됩니다.
이런 코즈믹 호러 장르가 하나의 장르문학으로서는 참 매력적일 수 있지만, 정말 문학으로 소비하고 말 정도로 이게 귀여운 수준인가 라고 여기기엔 다분이 현실적인 공통점이 있어서 씁쓸합니다. 게임 등지의 (주인공이 있고 악당이 있어야 하는) 세계관에서는 편리해서 많이 가져와서 쓰이기도 하지만요.
크툴루 신화의 뿌리를 더 찾으라면 저는 기독교를 비롯한 유럽의 종교문화를 꼽긴 하는데, 항상 머리가 촉수로 된 애들이 문어머리 아저씨들이 유독 등장하는 이유도 그런 문화에서 기인했다고 봅니다.
서양에서는 보통 오징어나 문어같은 촉수 생물을 극혐합니다.
아예 구약에서는 먹을 수 있는 해산물로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으로 규정하고 특히 문어는 '악마의 물고기'로 기피했습니다. -근대사 이전까지 제정일치 역사가 뿌리깊었던 점을 감안해 보더라도 사람들의 인식에 미치는 영향은 컷을거라 생각됩니다. 감자가 성경에 찾아보니 안 나온다고 해서 '악마의 열매'라고 규정한 뒤에 대기근이 와서도 감자에 손도 대지 않고 굶어죽었던 영국의 이야기만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심연의 바다 속에 사는, 그리고 해산물 중에서도 악의 축인 문어가 크툴루 신화의 얼굴마담으로 여겨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걸 수도 있습니다.